과거시험(과거제도, 과거)과 고려광종
1. 광종의 전제개혁
광종개혁의 핵심은 첫째, 유교적 통치이념의 실현을 위한 왕조체제의 정비와 관료층의 형성이며 둘째, 통치질서를 위협하는 구호족세력에 대한 제거이다. 광종의 제도적 개혁은 광종 7년 백관의 의관을 중국제도에 따르게 하였으며, 쌍혜
고려초 태조 왕건 때 다른 지배세력 호족이 왕실과 혼인을 맺고 대호족으로 성장한 데 비해 이천 서씨 가문은 왕실과 혼인한 사례가 없어 대호족으로 크지 못한 배경도 있다. 그래서 과거시험을 치루고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그리고 서희의 외교 능력의 탁월함도 돋보였는데 당시 고려는 송나라와 10년
고려 전기의 과거제도광종 9년(958년) 처음 실시된 과거제도는 당제를 모방하여 제술과, 명경과, 잡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제술과는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시험한 것으로, 급제자를 진사라고 하여 진사과라고도 하였다. 이는 덕종 1년인 1032년부터 실시된 진사시, 즉 국자감시와 구별되어야 한다.
고려의 정치제도는 재상 중심으로 짜여 있어서 무반은 실제로 정책 결정에 배제되었다.
더구나 최고 사령관직을 군인이 아닌 문관들이 차지하였다. 거란의 전쟁을 총지휘한 서희와 강한찬, 여진 정벌을 총지휘한 윤관, 묘청의 반란을 평정한 김부식 등은 모두 문관이었다. 지방의 수령도 과거에 합격
광종은 그 같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하여 일련의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 가운데 과거제의 도입도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과거는 시험에 의해 관리를 선발하는 국가고시제로서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광종 9년(958) 쌍기의 건의에 의해 중국의 제도를 도입해서 시행한 것이다.
미혼 자제를 수용하여 교육시킨 지방의 학교였다. 교육내용은 독서와 활쏘기를 비롯하여 5경(五經),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 삼국지(三國志), 문선(文選) 등이 읽혔다.
이곳에서는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교육기관인 동시에 군사적 기능도 수행하였다. 이것은 고려 이후에 서당의 전신이 되었다.
제도적인 뒷받침으로 교육시설인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소수림왕 2년(372)에 중앙에 태학을 설치하여 관리들에게 유학을 가르쳤으며, 평양천도 이후에는 지방에 경당이 설치되었다.
- 동양 : 왕에 의한 국가 경영 → 통치요원이 중시
- 고대국가형성 → 통치요원육성 → 태학(대학기관)
1. 고려의 성립과 발전
1) 왕건의 쿠데타
왕건이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것은 918년이다. 공양왕(恭讓王)까지 34대 475년간 존속했다. 신라 말에 송악(松嶽:開城)의 토호(土豪)였던 왕건은 태봉(泰封)의 왕인 궁예(弓裔)의 부하로 있다가 918년 궁예를 추방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
고려로 망명을 요청해 오자 재빨리 받아 들였다. 고려는 또한 고구려의 서울이던 평양을 서경이라 하여 북방 개척의 전진 기지로 삼아, 태조 말년에는 북쪽 국경이 청천강에서 영흥 지방에 이르게 되었다.
4) 제반제도의 정비
고려는 성종때 와서야 정치, 사회 제도가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중앙
4) 학당
학당제도는 중국에 없는 고려의 독특한 교육기관으로서 이는 조선시대에도 계승된다. 학당은 국자감에서 교육받지 못하는 서민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향교와는 달리 서울에 있었다. 학당은 중앙에 설치된 관학, 국자감의 하위에 속하는 초중등학교 수준의 학교였으며, 성리학서인 대학, 중용